『고려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1~2현북스, 2022 > 단행본 한국역사연구회

『고려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1~2현북스, 2022 > 단행본 한국역사연구회

『고려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1~2현북스, 2022 > 단행본 한국역사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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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의 권력은 지방에까지 미쳐서 행정적인 구획이 설정되기에 이르렀다. 과거에 부족들이 웅거하던 지역에는 성(城)을 쌓고 이것을 군(郡)이라 불렀다. 그 장관을 고구려에서는 처려근지(處閭近支)[7], 백제에서는 군장(郡將), 신라에서는 군태수(郡太守)라고 하였으나 일반적으로 성주(城主)라 했다. 뒤에는 여러 성을 통괄하는 행정 구획이 생겼는데, 이것이 고구려의 5부(部)였고, 백제의 5방이었으며, 신라의 여러 주(州)였다. 그리고 중앙 귀족의 근거지인 서울은 고구려와 백제에서는 모두 5부로, 신라에서는 6부로 나누는 특별한 행정 구획을 갖고 있었다.


상감청자를 만들 때는 그늘에서 말린 그릇에 원하는 무늬를 파내고 흰색이나 붉은색 흙을 파낸 곳에 메운 후 초벌구이를 하면 된답니다. 청자를 만들려면 먼저 불순물이 없는 고운 흙이 필요해요. 청자를 만드는 사람은 흙을 찰지게 만들기 위해 발로 밟기도 해요. 민간에서 불리다 궁중 음 악으로 유입될 때, 임금을 송축하는 내용과 여음 및 후렴구가 첨가된 것으로 보임.


염흥방은 그의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 참혹한 고문을 가하였지만 조반은 입이 찢기는 형을 당하여도 그 뜻을 굽히지 않았다. 22뭍길과 뱃길은 중앙과  지방을 묶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중앙에서 각종  공문서를 보낼 때도 길을  통하여 전달하였고, 조세를 거둘  때도 길을 통해야 하였다. 임금이나 관리가  이 길을 따라 지방을 여행하였고, 군사나 상인도 이 길을 이용하였다. 길 가는 도중에 잠을 자거나 물건도  쌓아 놓을 공간도 필요하였다. 즉 개경까지의 수송 거리와 난이도에 따라 달랐는데,  개경에서 가장 먼 남해안 지역에서 쌀  5석에서 6석의 운반비는 쌀  1석이었다.


세계를 제패하던  몽고군의 고려정벌군 총사령관 살리타이가 이 곳에서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한 것이다. 고려에서는 몽고의 침략에 대하여 정면으로 맞서  싸울 태세를 갖추었다. 고려의 중앙군이  몽고군을 물리치기 위하여  북상할 때, 몽고군은  서북지방의 여러 성들을 공격, 함락시키고 있었다.


16세기 초에는 김안국(金安國)이 다시 《잠서》를 번역해 《잠서언해》(1518년)라 하여 농가에 보급했다. 원예에 관한 책으로는 강희맹의 형 강희안이 세종 때 지은 《양화소록(養花小錄)》이 유명한데, 이 책에는 주로 화초 재배법이 기록되어 있다. 한백겸의 《동국지리지(東國地理志)》는 고대 지명을 새롭게 고증하여 역사지리 연구의 단서를 열어 놓았다.


더욱이 백성들에게는 이 천도가 국왕과 소수 권력자들의 안전만을 지키려는 일종의 배신 행위로 받아들여져 항전에 대한 공감대는 처음부터 매우 취약한 편이었다. 이후 견훤은 수군을 동원하여 몇 차례의 공격을 가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환웅이 무리 3천을 이끌고 태백산(太白山) 꼭대기 신단수(神壇樹) 밑에 내려와 여기를 신시(神市)라고 하니 이로부터 환웅천왕이라 불렀다.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를 거느리고 곡(穀), 명(命), 병(病), 형(刑), 선(善), 악(惡) 등 무릇 인간의 3백 60여 가지의 일을 주관하고 인간세상에 살며 다스리고 교화하였다. 무당은 일반적으로 성행하였고, 산신(山神)을 모신 사당과 서낭당 등이 있었으며 기타 귀신도 많이 모셨다. 중세의 예술은 귀족 중심의 우아하고 세련된 특징을 드러내고 있다.


이는 수렵생활을 주로 하여 하루하루의 식량 해결을 했던 구석기 시대에 비하여 농경생활에 접어들면서 식량의 저장이 필요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토기가 필요함을 느끼게 되었고 불을 활용하는 기술과 함께 빗살무늬 토기를 제작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신석기 시대 한반도 인류의 두 가지 통계의 활용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첫번째로는 토기를 사용함에 있어 식량의 저장이 필요함을 느꼈다는 것은 수의 개념을 체득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농경을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수확량이란 개념을 가지게 되었고 여기에서부터 가장 기본적인 통계가 활용되었을 것입니다.


이 중에서 가장 훌륭한 것은 부석사의 무량수전으로서, 고려 건축의 주심포2) 주심포란 지붕 머리와 기둥, 서까래 사이에 있는 짜임새(포, 두공)가 기둥 위에만 있는 양식을 말한다. 불교가 발달함에 따라 고려는 사상의 통일과 지도를 위하여, 현종 때부터 조판을 시작하여 문종 때에 와서 제1차로 6000여 권으로 된 고려 대장경의 간행을 완성하였다. 965년 2월 첫째 아들 주(후일의 경종)를 태자로 책봉하고, 장생전에서 잔치를 베풀었다.


공주들도 자신들이 살아오게 된 기쁨에 무사에 관한 일을 잊고 있었다. 잔치가 베풀어지고 있는데 무사가 나타나 자초지종을 고하자 왕은 크게 노하여 부하들을 죽이고 막내딸과 무사를 결혼시켰다. 옛날에 어떤 사람이 시집을 가서 재미있게 살았는데 남편이 문둥병에 걸려 헤어지게 되었다. 여인은 남편을 위해 약이란 약은 다 써보아도 효험이 없자 매일 남편의 병이 낫기만 기도하고 있었다. 어느 말 스님 한 분이 찾아와서 오봉산에 불을 놓고 남편을 찾아가면 낫는다고 하여 백 날 동안 오봉산을 찾았으나 찾지 못하고 남편 옆에 가서 죽으려고 남편을 찾아가다가 도중에 쓰러지고 말았다.


집이 열 채 있으면 그 중 두어 채는 기와집이라고 서긍은 말하였다. 고려 후기에 이르면 충선왕은 도성내 초가를 전부 기와로 이으라고 지시하였다. 五部의 민가 전부를 기와로 이으라는 분부이고 개인이 경영하는 기와굴을 금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1218)≪高麗史≫ 권 33, 世家 33, 충선왕 원년 8월 신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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